파편의 연대(連帶)

“햇빛에 반짝이는 약간의 먼지, 파라솔의 물결무늬 위로 떨어지는 녹은 눈의 물방울, 당나귀 주둥이의 잎사귀, 이것들은 물질에 의한 비유로, 이것들은 사랑의 이유를 사물들의 근거의 커다란 부재와 필적하게 함으로서 사랑을 발명한다.”[1]
1.
전시 <우아한 도시>는 경쟁적인 고도성장이 이뤄낸 수많은 동어반복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장소들은 작가 개인의 경험이나 삶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적다. 정경자는 이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물, 광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도시의 표정을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그녀가 찾아낸 표정들을 살펴보니 낯섦만큼이나 익숙함이 공존한다. 이러한 사진의 이중성은 장소의 모호함과 익숙한 피사체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의 정서를 지배하는 것은 맥락이나 상황보다는 시적 감응이다. 장소의 정체성이 지워진 채 우연히 발견된 이 사물/풍경은 비로소 사진에 의하여, 작가의 시선에 의하여 존재를 드러낸다. 시간도 장소도 분리된 사진 속 이미지는 익숙한 기억을 호출하기도 하고 반대로 익숙한 기대를 깨트리기도 한다. 작가에게 우연이란 단어는 사실 필연에 더 가깝게 이해된다. 도무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우연의 결과물들이 각기 다른 이미지들과 병렬로 접합되면서 사진은 여러 겹의 이야기로 발화(發話)한다. 일련의 사진들은 그저 무책임한 추억을 꺼내오는 것과 다르며, 그렇다고 구체적인 정황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자크 랑시에르는 사진 미학이 현실과의 유사성으로 예술이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것은 유사성이 변경된 어떤 체제, 즉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관계들이 이루는 어떤 체계의 체제이다.”[2] 다시 말해서 매체를 막론하고 이미지란 시각과 언어에 의하여 구성되고, 어떤 사조나 유파가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은 새로운 예술의 등장 덕분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정치적 상황에 의한 변화라는 것이다. 사진을 비롯한 이미지는 지식의 형태나 학술적 틀에 의해 해석되는 게 아니라 바로 예술가에 의하여 이미지의 다양한 가능성, 관계항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2.
근대로부터 세계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유형의 도시 산책자가 나타났다. 이미지와 언어, 문학과 미술, 사진과 미디어는 도시 산책자의 필수적 매체이다. 작가는 인공미로 채워진 도시를 산책한다. 발터 벤야민은 도시의 인공미를 사랑했다. 앤디 워홀은 엠파이어 빌딩을 실시간으로 촬영했고, 김수자는 보따리를 실은 트럭을 타고 굽은 길을 넘었다. 구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힘, 민중이 이끄는 세상은 기계와 인공미에 의해 가능할 것이라는 유토피아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상중은 세계화의 현장이 되어버린 도쿄를 크레올화(Creolization, 혼성화)되고 있다고 관찰했다. 유토피아는 단순히 천국이 아니다. 그곳은 여러 주체와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뒤섞인 정치의 장이고 무엇보다 투기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렇듯 개발 정책에 의한 고도성장의 꿈은 한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이다. 물론 이 꿈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는 또 다른 질문일 것이다. 더불어 모든 사람이 성장의 꿈에 물들어 있지도 않다. 현재는 바로 이 꿈 자체가 문제적일 터이니 말이다. 설령 젊은 세대가 윗세대의 꿈을 유산이라기보다는 짐으로, 아니면 이미 부패된 낡은 관념으로 치부한다 해도 그 누구도 쉽사리 부정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꿈은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개발도시에서 신도시로, 신도시에서 혁신도시로, 디지털미디어시티에서 에코시티로. 이렇게 세워진 도시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재개발은 대단지 공동주택뿐만 아니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도입하여 삶의 질, 소비를 위한 위대한 신전도 함께 개발되기 마련이다. 유토피아 실현의 기획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유토피아를 재현한 광고 이미지야말로 이미지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시각적 재현의 경향이 스펙터클에서 삶의 현장과 일상으로 시점을 이동시켰다고 해서 그것이 보다 진보적인 예술적 태도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이미지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질문해보자.
랑시에르는 <이미지의 운명>에서 재현적 이미지에서 비재현적 이미지로의 이행을 추구한 모더니즘(러시아 아방가르드부터 추상표현주의에 이르는)미술이 이미지의 종언을 고하고 이를 애도하려는 기호학자들의 관성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는 이제는 기호학적으로 이미지의 쾌락이 유효한 시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히 현대사진에 있어서 기호학의 영토를 벗어나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냉전시대의 역사적 잔해나 개발주의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세워진 기념비들을 찍거나(근대 이후의 표지석을 통한 역사의 재구성), 사물·인물·도시·자연을 모두 등가물로 전제하는 사진은 기표와 기의가 불일치하는 포스트모던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기호학의 세계로 해석될 수 없고 오히려 미학적이고 담론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을 종말의 징후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삶의 체제가 바뀌었다고 보아야 할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랑시에르는 위의 물음에 대하여 아마도 체제의 변화라 답할 것이다.
3.
정경자는 보는 이에게 사진의 순수성을 주장하지도 않고 기호학적 해석에 근거한 의미화에서도 벗어나 있다. 장소의 구체성과 대상의 정보가 불확실한 상태의 사진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기억·지식·경험 등을 활용하여 유사한 대상들과의 대입을 시도한다. 우리들은 그저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 짓다 만 건물의 유형, 초현실적인 풍경을 닮았다고 혹은 연상시킨다는 생각을 되뇔 수밖에 없다. 그녀는 복합적 이해관계와 이기심으로 세워진 유토피아의 클리셰 주변을 배회하면서 과장된 파사드와 멋부린 그래픽으로 속내를 감춘 욕망의 기표에 가려진 대상/존재를 발견한다. 그것은 종마처럼 맹목적인 경주 상태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정경자가 우연히 발견한 사물/풍경은 가시적/비가시적 관계가 이룬 체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 순간적인 사진이 작가의 즉흥적인 심리 상태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비평적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랑시에르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무언의 말[하기]로서 사물의 한복판에 거주.” 한다고 말한다. 정경자의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시간, 언어,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보이는 세상을 절개한다. 인류의 진리나 삶의 비밀을 캐기 위한 해부학적 절개가 아니라 그녀가 볼 수 있는 시각적 한계를 유효한 세계로 한정시킨 후 평면으로 만든 세계의 이미지를 도려내는 방식에 가깝다. 이처럼 포착된 장면은 애초부터 거대한 맥락에 속하지 않은 것들로 이뤄졌다. 그것들은 화려하든 초라하든 역사를 갖지 않은 채 우발적인 기획이나 일시적인 방책으로 탄생한 것들이기에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 작가는 탈역사라는 문화적 저항과 무관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와 의미를 갖지 못 한 대상/풍경을 발췌한다. 짧지 않은 작가로서의 발자취도 대개 이 ‘발췌’를 통하여 시적 순간을 제시했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적 순간’을 혼돈하지 말자. 왜냐하면 여기서의 시적 순간은 단순히 상투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표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발췌된, 혹은 절개된 이미지가 세계의 일부이면서 또한 사회적으로 가려진 표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4.
<우아한 도시>에 소개된 콜라주를 통한 이미저리는 관객에게 이미지들 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찾으라고 유도하는 듯하다. 언뜻 보면 유사한 대상들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 간의 유사성은 색, 질감, 형태와 같은 조형적 특성일 뿐, 피사체와의 공통분모는 희미하다. 모순적 상황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담장 위에 불쑥 솟아있는 철골의 형태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뻗은 이름 모를 식물의 몸짓의 조합, 댄 플래빈(Dan Flavin)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형광등과 탁구 네트 뒤 주홍 탁구공이 놓인 사진의 조합은 자연과 인공, 예술과 일상을 비교한다. 그것은 작가의 판단이나 관객을 향한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성공을 향해 질주한 끝자락에서 발견되는 우연의 산물이자 기획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완결될 수 없는 삶의 장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다시 새로운 인식의 체제로 되돌아가보자. 정경자의 사진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사이를 맴돌고 있다. 개발과 욕망으로 기획된 도시들의 웅장한 광경은 적나라하게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시한다. 그것들은 시각적으로 숨김없이 지시한다. 설사 구체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더라고 광경의 미학은 다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을 항시적으로 제안한다. 구체적인 상품이나 내용은 감추면서도 그것은 매우 촘촘하게 말하고 있다.
정경자는 강력한 사회적 욕망의 목소리와 이미지 사이에서 말을 잃어버린 대상들, 틀림없이 존재하지만 지나치게 관습적이기에 사람들부터 소외된 인공물과 자연물과 마주한다. 그것은 바르트의 푼크툼(punctum)의 명시적 의미 “그건 그랬지 ça-à-été”를 체현한다. 게다가 전시 <우아한 도시>는 관객들의 회상을 허락하는 정서적 공감에 머무르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기획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꿈틀대는 생명의 잠재력과 완벽하게 제어되지 않는 인공물의 저항을 보여준다. 영상 작업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임의로 사진들과 조합된다. 의미는 관객의 경험이나 취향에 따라 무한 생성될 것이다. 작가는 파편을 전체의 일부로 편입시키지 않고 오히려 파편들을 병렬하여 예측할 수 없는 의미들이 발생되도록 유도한다. 이 같은 문장과 이미지를 뒤섞은 작업은 아직 실험의 단계로 보이지만 비슷한 유형의 작가들(마사 로슬러, 소피 칼)과 다른 지평을 발견하기를 개인적으로 기대한다. 더불어 그녀의 “사진적 찰나”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고,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의 웅성거림에 더 가까이 다가가길 바란다.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교수)
[1]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화, 2014, 83쪽
[2] 같은 책,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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