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가까이 _ 한 장의 사진이 마술 또는 실재가 되기까지

“사진가가 보려고 희망할 있는 것보다 카메라는 많이 기록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차라리 사진을 마술로 받아들인 철학자와 리얼리스트의 주장처럼, 과학의 원리를 활용한 하나의 기계장치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심지어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카메라에 대한 공적인 믿음과 사진에 대한 사적인 반응이 서로 밀고 당기는 현상이랄까. 처음으로 창작자의 손을 벗어난 채 탄생한 시각예술(또는 마술)은 감상자 마음의 심연을 파고든다. 영화 이론가 로라 멀비(Laura Mulvey)는 그것을 일컬어 서로 모순을 이루는 인덱스(index)와 언캐니(uncanny)가 서로 뒤섞인다고 했다.
눈앞에 놓인 한 장의 사진에 이끌리는 과정은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미묘하다. 그 이끌림의 강도에 따라 사진은 감상자의 층위를 점점 깊게 파고든다. 늘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마술을 부리면서 말이다. 마치 지나간 시간이 구워낸 케이크에서 한 조각을 무덤덤하게 잘라내어 지금 맛보는 것처럼,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표현을 빌자면, 사진은 내 눈앞에서 지금이었다. 즉, 사진은 ‘지금’에 과거를 그림자처럼 데려온다. 그림자. 알다시피 이것은 사진을 존재하게 만든 빛의 원리가 작용해 탄생한 현상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필연으로 데리고 온다는 것은 사진의 숙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진이 데려온 숙명의 그림자는 언캐니를 유발한다. 그것은 일상에 길들여진 우리의 허를 찌르며 돌연히 튀어나온다. 한 순간 우리를 뒤흔들고 친숙함과 낯섦을 찰나에 경험하게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정경자의 사진이 극명히 드러내는 ‘돌연히 튀어나옴’을 떠올린다. 빛이 인화지 표면에 정착되어 튀어나온 피사체 이후, 그의 사진에서 다가오는 돌연히 튀어나옴의 실재를.
나는 정경자의 사진을 돌연히 튀어나온 것들의 실재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말 그대로의 느낌처럼 그의 사진에서 피사체는 튀어나온다. 아니, 시선이 그 피사체를 향해 튀어간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겠다. 나는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커튼, 문고리, 나뭇가지, 천, 심지어 숲이 일렁이며 반사된 수면이나 구름의 가느다란 꼬리에까지 말이다. 그 대상들은 관람자의 만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배경은 배제된 채, 얕은 심도로 포착한 피사체는 매우 촉각적이다. 이끌린 시선은 가상의 표면에 부딪히지만, 우리는 결국 만질 수 없다. 관념이 만들어낸 실재가 그렇듯, 사진이 지나간 시간을 아무리 불러내도 그것은 물리적으로 현재가 아니다.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의 말처럼 “예술처럼 영원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방부(防腐)해 다만 그 자신의 부패로부터 시간을 지킬 뿐이기 때문이다.”
정경자는 작가노트에서 자신의 사진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초현실적인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경험이 여행자의 시선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자의 시선은, 타자(자신이 아니라)에게 친숙한 공간에서 실재를 경험하는 특권이다. 여행지에서 여행자는 현지의 인간으로부터, 동시에 사물로부터 타자화된다. 그들은 여행지에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가로막는다. 반면에 길들여지지 않은 주체인 여행자는, 덕분에 일상이라는 꺼풀을 마음껏 벗겨내 볼 수 있다. 여행자의 눈앞에 (언캐니처럼) 돌연히 튀어나오는 것들이 유독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에게는 거리의 쓰레기도, 낙서도, 이끼도 그리고 삶과 죽음의 느낌도 돌연히 튀어나온다. 그것이 바로 여행자가 경험한 실재다.
때문에 정경자가 경험하고 담은 현상과 대상은 초현실이라기 보다 숨은 실재의 드러남이 아닐까 한다. 그에게 피사체는 사진으로 남겨지기 이전의 푼크툼(punctum)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고스란히 프레임에 담아 방부한다. 우리는 눈앞에 놓인 한 장의 사진에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영원히 다가갈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마술처럼, 실재처럼, 그의 사진은 우리를 농락하고 ‘한때 있었음’의 이야기만 조용히 속삭인다. 우리는 으스스한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이야기를 볼 수 있을 뿐이다.
허태우(<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