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열정

‘조용한 열정’을 지닌 예술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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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 한순간에 타오르는 ‘격렬한 열정’이 있는가 하면,
쉽게 끓었다 식기를 반복하는 ‘가벼운 열정’도 있고, 흔들림 없이 제 목적을 실현   해나가는 ‘차가운 열정’도 있다. 제 몸피를 감당하지 못하는 ‘무거운 열정’이 있는   가 하면, 발산하지 못해 안달하는 ‘시끄러운 열정’도 있다. 시인 조은의 열정은    어떤 모습일까.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단단한 뿌리를 가진 그는 ‘조용한 열정’   을 가진 사람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내겐 언제나 꽃이 지는 것이 충격이 아니었다. 언제나 나는 꽃이 피는 것에 충 격을 받았다.” 시인이 ‘낙화’가 아닌 ‘개화’에 충격을 받는 이유는 그 꽃이 ‘곧 져   야 할 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한번도 꽃을 매달아본 적 없었던’ 자신의 인생을 결코 쓸쓸하게 돌아보지 않는다. 시인에게는 화사한 꽃을 피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심스레 생명의 촉수를 더듬는 실존의 문제가 언제나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십대에 탄탄한 성공의 기반을 다지는 대신 남쪽의 섬을 떠돌며 “굼벵이보다 더디게 성장했다.” 성급하게 꽃을 피우는 대신, ‘조용한 열정’을 천천히 달구어온 저자는 지나온 ‘과거’야말로 자신의 인생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과거야말로 내 삶에 가장 오랫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다. 내가 현실적 삶을 거부하거나 수용하도록 하는 것도 직관이나 이성이 아닌 과거의 경험일 때가 많다. 심한 충격을 받았을 때에도, 삶이 뒤죽박죽되었을 때에도, 외로울 때에도, 찰나의 행복을 느낄 때에도, 내 의식은 고통을 감수하며 과거로 회유한다.” (129p)
쓸개즙처럼 쓰디쓴 과거의 기억들
조은은 2년 전, 『벼랑에서 살다』(마음산책) 라는 제목의 산문집에서 독신의 전업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신산함과 가난한 이웃들의 생명력을 섬세하고 결기 있는 필치로 그려내 따뜻한 반응을 얻었다. 『벼랑에서 살다』에서 시인이 몸담고 있는 현재의 시공간을 그려냈다면 두번째 산문집 『조용한 열정』에서는 그의 내면을 형성한 과거의 어둔 기억을 더듬어 내려간다. 가족 그리고 제도 교육과 불화했던 나날들, 죽음을 기다리며 삶을 허비했던 날들, 그 예민하고 우울했던 시절에 겪었던 마찰과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상처는 성숙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아물기도 하고, 또 시로 발효되기도 했다. 성장통을 깊이 앓았던 그의 내면을 따라가다보면 자의식이 강했던 한 여자 아이가 한 명의 시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다. 조은에게 있어서 상처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그때와 같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게 한다. “나는 요즘 흙탕물처럼 임시방편적으로 가라앉혀 놓은 생각들을 하나하나 들춰내서 쓸개처럼 핥고 있다.” 이 책은 그 쓰디쓴 회상의 결과물이다.
과거를 향한 조은의 여정에는 사진작가 정경자가 동행했다. 올 봄, 한 방송국의 개국 특집 프로그램 <예술가의 초상>에 출연했던 조은은 스태프였던 정경자의 “조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에 매혹되어 꼭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정경자 또한 조은과의 만남에서 5년간 놓았던 카메라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게 되었고 사진 공부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로의 ‘조용한 열정’을 발견한 두 사람은 글 16편, 사진 68컷이 어우러진 책을 함께 펴냈다. 철조망, 새장, 길, 붉은 산당화, 말라붙은 대지, 말갛게 눈을 뜨고 죽은 생선들, 초라한 풀꽃들, 누렇게 말라가는 책장들…… 정경자가 찍은 총 68컷의 사진들은 조은의 트라우마를 흐릿하면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느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늘에 뿌리내린 한 시인의 성장통, 삶의 열정
“무엇인가를 자기만의 시각으로 뚫어지게 바라봐야만 직성이 풀리고, 그것 때문에 세상과 마찰하며 자기 양심에 시달리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면 조은은 어린시절부터, 그 좁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봄이면 찹쌀떡처럼 하얀 마른버짐을 얼굴에 뒤집어쓴 채 영양이 부실한 부스스한 머리를 소쿠리처럼 이고 다니던” 조은은 지독한 편식가였다. 잔인하게 개를, 돼지를, 닭을 잡는 광경을 본 이후부터 그는 “아무 거나 먹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유는 소의 젖이라서, 버섯은 씹을 때 느낌이 고기 같아서, 생선은 눈을 말갛게 뜨고 있어서, 꿀은 인간들이 조그만 벌들에게서 빼앗은 거라서 먹을 수 없었다. 어린시절부터 시작된 ‘지독한 편식’은 그가 앞으로 겪을 불화의 시작에 불과했다(「지독한 편식」).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어둡고 불만이 많은 아이’였던 조은은 느릿느릿 울면서 등교하느라 지각하는 날이 많았다. 어느날 하교길에서 기차를 본 순간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질투와 분노가 떠올라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탕탕탕 하며 기차 지붕을 두드리는 돌멩이 소리가 어린 마성魔性을 일깨우는 노크소리처럼 나를 자극했다”고 조은은 회상한다(「일찍 피는 꽃들)).
조은이 본격적으로 ‘불량 학생’이 되기 시작한 것은, 미션 스쿨인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부터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전교생이 줄을 서서 학교에서 뚝 떨어진 교회로 가 예배를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이건 절대 나의 의무사항이 아니야’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대열을 이탈했던 조은은 교장 선생에게 발각되어 한바탕 시련을 겪어야 했다(「허공을 딛는 마음)). 학생 신분으로 영화관에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시절 <스팅>을 보다가 학교 선생에게 들키는가 하면(「보이는 것보다 더)), 어느 해 여름에는 친구 오빠들과 짧은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학교 선생님들을 만나고도 태연했다는 이유로 ‘정학이냐 퇴학이냐’의 위기까지 가기도 했다(「난해한 사랑이여)).
“선생님들이 마음만 먹으면 자아가 강한 제자들의 인생을 얼마든지 망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조은은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어머니가 불려와 대신 용서를 빌곤 했다. 암흑으로 치닫는 자신의 손을 수없이 잡아줬던 어머니의 손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음을 상기하는 시인은 늘상 희생하며 살아오다 지금은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본다.
한편, 가족을 짐스럽게 여기고 집 밖으로만 떠돌았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생각의 전환을 겪는다. 한때 젊은 여자와 데이트하는 아버지를 목격하고 깊이 원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와서야 아버지 삶에 그 같은 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온다. 왜 그를 한 인간으로 크게 보지 못하고 아버지라는 자리에 앉혀놓고 인습이라는 끈으로 친친 동여매야만 직성이 풀렸을까, 후회가 된다.” (63~4p) 이처럼 시인은 상처의 기억을 은폐하거나 망각해버리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했기에 얻을 수 있는 성숙의 깨달음을 글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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